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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출판네트워크

편집자 Choice

나라는 을(乙)들에게

한빛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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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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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지영

1,397

을의 철학

한빛비즈

얼마 전인 2019년 3월 초,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 달러를 넘어섰다는 기사가 났다. 마침 이 책의 제작을 넘기고 보도자료 작성을 시작하는 날 아침이었다. ‘진정한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며 한껏 상기된 앵커의 얼굴을 보자 자동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OECD 가입 뉴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등굣길 교복을 꿰입던 어린 나조차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소식에 속없이 반가웠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네, 어쩌네 하더니 나라가 그야말로 홀라당 망해버렸다. 세상에! 그게 언젠데 이제야 ‘진정한’ 선진국이라니. 22년이나 일찍 터트린 샴페인은 얼마나 맛이 없을까? 이번엔 반갑기는커녕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렸다. 나도 어른이 다 되었네. 

 

사람들은 망해버린 나라에서 죽기 살기로 버텼다. 이제 잘 사는 이들은 더 잘 살고, 못 사는 이들은 더 못 산다. 평생을 벌어도 갑과 을, 금수저와 흙수저의 격차를 극복할 수 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돈 안 드는 온라인에라도 나를 전시하며 ‘정신승리’로 버틴다. 그렇게 우리는 SNS에서야 평등하게 만난다. 물론 “쥐약 사 먹고 죽으려 해도 약 살 돈이 없다”는 험한 말까지는 나오지 않는다. 나는 선진국 국민이니까. 동네 약국에 없다면 옆 동네 약국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사 먹을 정도의 돈은 있다. 하지만 그런 ‘있는 척’도 금물이다. “애걔! 그래도 버스 탈 돈은 있네!” 하며 가난의 진정성을 의심할 타인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들도 다 나 같은 ‘을’이다. 버티느라 각박해진 우리는 이제 ‘없음’을 경쟁한다. 필터가 작동하는 따스하고 아기자기한 온라인 속 일상은 자본주의가 만든 슬픈 판타지다. 

 

이 책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원래 그렇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 졸업 후 안 해본 알바가 없는, 나와 내 친구들을 닮았다. 그런 그녀가 성산대교라는 쥐약 대신 찾은 생의 묘약이 바로 철학이다. 묘약이라고는 하지만 달콤하지는 않았다. 내가 볼 때 그녀는 약국 대신 찾은 도서관에서 매일매일 철학에게 혼났다. 심지어 원고에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는 표현도 여러 번 등장한다. 철학은 그녀에게 네 녀석은 왜 도망만 쳤냐고, 왜 너를 세상과 분리하지 못 했냐고, 왜 너를 좀 더 사랑해주지 않았냐며 아픈 곳만 골라 때렸다. 하지만 철학의 뼈아픈 다그침에 속엣말을 토해내자 이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대한 충격 그 자체였던 망치가 어느새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기억장치가 되더니, 결국에는 지독한 자기검열의 얼음장을 깨는 도구가 되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철학이 주는 위안을 만난 한 인간의 성장. 이 책에는 그 성장통이 담겨 있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한 달이면 수백 통에 이르는 투고 원고가 들어온다. 그 많은 원고 중에서 이 원고를 처음 만났을 때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렇게 기를 쓰며 사는 동안, 세상은 내게 뭘 해줬나” 하는 의문을 단물 빠진 껌처럼 곱씹고 사는 내게 이 원고는 그 자체로 작은 해답이었다. 세상 탓을 내 탓으로 돌렸던 그때의 나, 미친놈 탓을 내 탓으로 돌렸던 그때의 나, 상황 탓을 내 탓으로 돌렸던 그때의 나. 그 모든 순간의 나에게 마르크스와 니체, 들뢰즈의 일갈이 들리는 듯했다. 

 

“자기검열 좀 작작 해라. 인간아!” 

 

자신을 향한 검열과 증오를 멈추고 나를 둘러싼 주변을 돌아보는 일. 자기 안에 철학이 있는 사람은 그걸 해낸다고 한다. 사실 굳이 연대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뉴스에서, 직장에서, 마트에서, 택시 안에서, 병원에서, 아파트 주차장에서 우리는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안도한다. ‘을乙’이라는 표현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을 등급 매기는 이 잔인한 언어가 일상이 되고 제목이 되었다. 하지만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 곁을 스쳐 가는 모든 이들의 삶 역시 그들의 철학 안에 있다. 내 잘못이 아닌 걸 알고 나니 꾸역꾸역 희망이 솟는다. 이 원고 덕분에 남몰래 가꾼 텃밭에서 작은 싹이 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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